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캐서린 헵번 (문단 편집) === 스펜서 트레이시와의 만남 === 헵번은 1941년에 환상의 짝꿍과 만나게 되는데, 바로 [[스펜서 트레이시]]다. 1941년 헵번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<그 해의 여자>의 각본에 직접 관여하고 다시 감독 및 주연 선택권을 가졌는데, 남자 주인공으로 트레이시를 추천한 것이다. 헵번의 선택대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42년 2월에 개봉해 성공을 거뒀고, 헵번은 네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됐다. 헵번은 트레이시와 사귀게 됐지만 유부남이었기에 불륜 관계였는데, 트레이시가 이혼을 완강하게 거부해 헵번은 평생 트레이시와 결혼하지 못했다. 트레이시는 [[알코올 의존증]]과 [[불면증]]에 시달리고 자주 우울해했는데, 헵번은 그가 편안해지도록 곁에서 헌신하느라 1943년 "Without Love" 폐막 이후 1950년에야 다시 연극 무대에 나올 정도로 일이 줄어들었다. 한편, 1944년 [[펄 벅]] 원작의 에서 야심차게 중국인 농부를 연기했지만, 영화는 적자를 봤다. 트레이시-헵번 커플의 인기에 MGM은 둘을 짝으로 맺은 영화를 계속 만들어냈는데 눈 먼 영웅 숭배를 주제로 한 <키퍼 오브 더 플레임>(1942)처럼 흥행에 실패한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흥행 성적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했고 1949년 조지 큐코어 연출의 코미디 영화 <아담과 이브>가 트레이시-헵번의 40년대 주연 영화 중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. 이 영화는 둘의 주연 영화 중 최고로 평가 받았고, 1992년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선정, 보존되었다. 1950년 1월 어느덧 40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헵번은 "[[뜻대로 하세요]]"에서 로잘린드 역을 맡아 [[뉴욕]] 코트 극장[* Cort Theatre.]에서 공연했다. 그 뒤 [[존 휴스턴]]이 연출한 <아프리카의 여왕>에 고지식한 독신 선교사 역으로 나와 [[험프리 보가트]]와 연기 대결을 했는데, 헵번의 첫 테크니컬러 영화였다. 이 영화는 주로 [[벨기에]] [[콩고]] 로케이션에서 촬영됐다. 휴스턴은 전 [[영부인]]인 [[엘리너 루스벨트]]를 모델로 삼을 것을 주문했고, 1951년 말 개봉 결과는 성공이었다. 대중의 지지와 비평가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고, 햅번은 다섯 번째로 [[아카데미 여우주연상]] 후보에 올랐으며, 보가트는 자신의 유일한 [[아카데미 남우주연상]]을 수상했다. 당시엔 트레이시가 헵번보다 인기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는데, 10년 전 찍은 <필라델피아 스토리> 이후 트레이시 없이 만든 이 첫 번째 성공적 영화를 통해 단독으로도 흥행이 가능함을 증명하며 인기를 재확립했다. 헵번은 이 영화를 시작으로 1950년대에 자주 해외로 나가 작업하며 다양한 연기의 기회로 삼았다. 1952년 여름엔 [[조지 버나드 쇼]]의 "The Millionairess"를 [[런던]]의 [[웨스트엔드]]에 위치한 New Theatre에서 10주간 연기했다. 연기에 대한 평가는 갈렸지만 인기는 확실히 있어 [[브로드웨이]]로 진출해 다시 10주간 공연했다. 한편 헵번은 [[MGM]]과의 계약에 따른 마지막 작품인 스포츠 코미디 <팻과 마이크>(1952)로 트레이시와 다시 호흡을 맞췄다. 수상한 [[프로모터]]의 도움을 받게 되는 골프/테니스 분야 여성 선수를 다룬 이 영화는 헵번의 뛰어난 운동신경이 돋보이는 작품이다. 커플의 주연 영화 중 호평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이며 헵번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다. 이 작품으로 헵번은 1953년 [[골든 글로브|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]] 후보(뮤지컬/코미디 부문)에 처음으로 후보 지명되었다. 1955년 [[데이비드 린]]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<여정>에서 다시 한 번 깐깐한 독신여성을 연기했는데 여기에선 사랑 찾기에 성공한다. 헵번은 나중에 린이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훌륭한 감독이라고 말했다. 린 역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헵번이라고 밝혔다. 이 영화를 찍다가 본인의 잘못으로 수로에 떨어지는 바람에 만성 안감염증에 걸렸지만 그게 헵번을 멈추게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. 헵번은 그대로 올드 빅의 호주 [[셰익스피어]] 투어에 참여해 "[[말괄량이 길들이기]]"의 캐서린, "[[잣대엔 잣대로]]"의 이사벨라, "[[베니스의 상인]]"의 [[포셔#s-1|포셔]] 역을 맡았다. 1957년에 고향의 아메리칸 셰익스피어 극장[* American Shakespeare Theatre.]에서 포셔를 다시 선보이면서 "[[헛소동]]"의 베이트리체도 연기했는데 많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. 1962년엔 [[유진 오닐]] 희곡이 원작인 <[[밤으로의 긴 여로#s-4|밤으로의 긴 여로]]>, 1967년엔 트레이시의 마지막 작품인 <초대받지 않은 손님>에 나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